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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일1말씀] 마태복음1:20-30 너희를 쉬게 하리라

by jiroky 2021. 4. 2.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번 구절에서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고 제자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 예수님께서 많은 치유 사역을 벌이셨습니다. 많은 가르침과 치유를 보여주셨음에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굉장히 냉담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마을에서 떠나시길 바랬었죠. 그들은 많은 기르침과 기적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음에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과연 우리는 어떤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겉으로도 드러난, 눈에 보이는 이적과 기적을 기대하고 따르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면 그 현상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따르고 있나요? 내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예수님을 의심하지는 않나요? 신앙은 본질을 찾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결국 본질을 찾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신뢰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배 자체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고라신은 지명은 나오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그럴까요? 본문의 맥락으로 봤을 때 엄청난 배척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굳이 기록하지 않아요. 기록할만큼 가치있는 일은 아닌거겠죠?

⇒ 벳새다에서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맹인을 치유하셨고, 병자를 고치셨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두로와 시돈은 해안도시입니다. 반역, 패역, 우상숭배, 교만의 대명사로 불리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문화가 지배했던 지역입니다.당시 유대인들은 입에도 담지 않을 정도의 불경스러운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곳입니다.

⇒ 이 지역을 명백하게 대조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대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두로와 시돈 땅보다 구원받기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어릴 때 자랐던 곳입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이지요. 가버나움 사람들은 늘 자신들의 눈에 익었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다시 말해서 과거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은 것이지요.

⇒ 소돔과 고모라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에서 가장 패역한 도시지요!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셨던 곳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이 그 소돔땅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 비록 진짜를 가졌다고해도, 그 진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다른 것에 매이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진짜인 메시아의 가치를 몰라보고 오히려 배척합니다. 이것이 가버나움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고 다 괜찮을까요? 주일날 예배는 드린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반드시 이 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면 할 수록 하나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만이 우리의 마음을 굳어버리게 만드는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이 분별력있게 깨어있음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가버나움 같은 신앙으로 굳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군요. 섭리이군요"라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그리고 온전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어린 아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슬기롭고 지혜있다는 말은 세상 이치에 밝다는 의미로 쓰인 표현입니다. 현명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에 너무 밝아서 잔머리를 쓰는 지혜를 말합니다. 나는 신앙 생활도 오래했고, 율법에도 정동하다고 스스로에게 취해 자신을 자부하는 지혜입니다.

⇒ 한글성경에는 어린 아이들이라고 번역되어 잇지만, 원문에는 갓난 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어미의 젖을 찾는 아기처럼,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군요! 잘못된 신앙관에 사롭잡힌 저들을 일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시군요!"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 나 자신의 경험이나 나의 지혜말고, 다 내려놓고 전적으로 갓난 아기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내 것가지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내것을 붙드느냐 하나님을 붙드느냐 이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살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그 분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아들이 아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것을 알아보는 특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신앙은 앎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원문에는 '속히, 빨리'라는 의미의 단어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고 율법에 매어있는 너희들! 빨리 나에게로 와라. 내가 그 짐을 내려주고 쉬게 할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청하실 때 믿음으로 어서 받아들어시길 바랍니다.

⇒ 예수님께 갈 때, 내 멍애가 다 없어지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 모든게 다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전히 다 있어요. 근데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난 후에 나의 짐과 멍애를 보면 다르게 느껴집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의미 있는 고난이고 이겨낼 수 있는 고난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보는 가치관을 변화시키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멍애입니다. 가치관이 변하면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기꺼이 짊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순간 그 멍애는 엄청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능히 질 수 있고 질 가치가 있는 멍애가 됩니다. 더 무거운 멍애를 졌는데, 더 가볍게 느껴지는 멍애, 그리고 안식과 쉼이 있는 멍애. 그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멍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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