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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일1말씀] 요한일서 1:1-10 사귐과 누림의 신앙

by jiroky 2021. 1. 26.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 요한은 유독 사랑받는 제자라는 자기 인식이 강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이지요.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장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떻게 사랑에 대한 확신이 이렇게 강했던 걸까요? 그는 특별히 예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세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은 예수님 곁에 오래도록 머물지 않았다면 목격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만큼 그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당시 사도들은 성도들의 믿음을 어떻게 하면 확고히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 자체를 부인했어요. 결국 기독교 교리 전체를 흔드는 자들이었지요.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 요한복음도 그렇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장엄한 말로 시작합니다. 태초란 언제일까요? 우리로서는 당최 알 수 없는 시간이죠. 이런 모든 표현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자 하는 그만의 유별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려고 열심을 다했죠.

⇒ 생명의 말씀 - 생명이 곧 말씀이라는 거죠. 생명이시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직접 듣고 봤다고 말합니다. 그가 오신 목적과 소명을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어떤 종교에 사귐, 누림, 기쁨, 생명이란 단어가 있겠어요? 이것은 우리 신앙이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우리는 교재가 있고 사귐이 있는 신앙이라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르겠다고 하셨잖아요!!! 종은 주인의 뜻을 몰라요. 하지만 친구는 그 친구의 뜻을 안단 말이에요.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사귐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는지 말하고 있어요.

롬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울 수 있는 까닭은 그 분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마 우리가 그 분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화목 재물이라고 하는 거에요.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를 화목재물로 받으시면서 우리의 죄를 없는 것처럼 간과해주셨다는 거에요.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된거에요. 교회는 가르치고 배우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에요. 교제에 목적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귀는 존재요. 그리스도와 누리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사귐은 교재하다라는 뜻의 코이노니아에요. 교회는 사귐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힘을 입어서 더 이상 어둠에 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둠은 죄와 악을 의미해요. 그 분은 죄와 무관하신 존재에요. 세상과 다를바 없는 행동들이 교회에서 자행되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혹은 그런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행위이거나 본인이 하나님과의 교재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 뿐이죠.

⇒ 구원받은 공동체인지는 교회 안에서 사귀는 것을 보면 알아요. 그래서 소그룹, 구역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참 중요해요. 그 작은 공동체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그 안에서 제대로된 사귐이 일어난다면 그거야 말로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교회 공동체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그렇지 못하다면 그게 과연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냐는 거에요. 우리 사귐의 축은 먼저 수직적인 사귐이 세워져야 해요. 그리스도와의 사귐, 기도와 말씀이 제대로 바르게 세워져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평적인 성도와의 교재를 잘 이루어갈 수 있는 거지요. 결론은 하나님과의 제대로된 사귐이 없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재도 만들어갈 수 없다는 거에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진리의 영이 오면 비로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는 거에요. 확연히 구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거짓말 할래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 또한 죄를 자백하는 존재가 됩니다. 왜냐면 죄를 자백해도 안전하거든요. 하나님은 7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백할 수 있는 거에요. 왜냐면 그 분은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신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 분은 언약을 지킬 수 있는 분이신거죠.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신실해지는 존재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욱 말씀에 붙들린 신앙인이 되야하는 거에요. 그 분의 말씀이 곧 그 분의 약속이기 때문에요. 근데 자꾸 죄로 돌아가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게 되잖아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신실함이 회복되고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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