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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일1말씀] 마태복음 22:23-33 무지에서 생긴 오해

by jiroky 2021. 5. 14.

 

부활논쟁 (막12:18-27; 눅20:27-40)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어떻게하면 정치적, 종교적으로 흠을 잡아서 그 분의 사역의 근거를 흔들것인가가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왜 남의 신앙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을까요?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지 않으면 우리 믿음조차 흔들리고 때로는 벗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은 신경 안쓰고 남의 믿음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을 봅니다. 참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신론자도 그래요. 남이 믿는다는데 왜 그들은 그것을 흔들지 않으면 못견딜가요?

그것은 진리의 세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누리고 있으면 그 진리를 흔들지 않으면 못베기는 불안함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에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같은 악함으로 끌어들여야 마음이 편해져서 그러는 거에요. 따라서 신에 관한 논쟁은 지극히 조심해야 하고, 사실 논쟁거리도 아닙니다. 무신론자의 결론은 뻔하잖아요? 문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문제지요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 사두개인들은 다윗의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지극히 현세적이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세를 믿지 않았고 부활, 영생을 믿지 않았고, 모세 5경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토라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현세를 중요시 하다보니 사실 권력의 상층부를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유대 종교 전체를 쥐락벼락했지요.

⇒ 그런 그들이 와서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해 한 비유가 칠형제와 결혼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다 부활하면 그 여인은 누구랑 살아야 하나? 이런 얼토당토한 질문을 합니다. 말 그대로 부활을 부인하기 위한 질문이지요. 흔하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가문을 잇는다는 원칙이 있었고, 선조부터 받은 땅이 다른데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지켜졌던 혼인의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답입니다. 너네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니 잘못 알고 있다. 부활 후에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시집도 장가도 안간다.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 예수님께서 출애굽기의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 5경만 보니까요.

출3:6-7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우리 고통도 알고 지금의 우리 고통도 알고 계십니다. 보면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계세요.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그 말은 여전히 그들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에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와 현재나 미래나 동일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사두개인들이 왜 불쌍한 존재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이 땅의 삶만 바라보는게 전부라면 그거야 말로 진짜 불쌍한 사람이라는 거죠.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의 삶에 목숨을 걸었어요. 그래서 기득권층의 대명사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왜냐고요? 부활이 없으니까 여기서 잘 살아야죠!!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다? 그건 저주의 결과.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산다? 그건 축복의 결과. 이것이 사두개인들의 생각이었어요. 그 후예들이 지금은 없습니까? 이단도 마찬가지지만 많은 종교인들의 무리가 이 땅에서 부유하게 성공하며 잘 사는게 신앙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신앙의 맥은 끊기지 않을 겁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땅에서 고난 받으려면 왜 신앙을 가지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존재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부유하고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산 것이 신앙 안에서 맺은 아름다운 결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현세적 삶에 집착한겁니다. 이 땅 너머에 있는 삶, 부활을 믿지 못하면 이 세상 누구보다 불쌍한 사람인 거지요.

 

고전 15:42-46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우리가 영의 사람, 육의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영생의 생명을 지녔냐에 관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 부활이 언제냐 하는 논쟁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데, 성경에는 마지막 날 부활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럼 그렇게 부활했을 때 영생에 들어가는 사람과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내 백성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리고 영벌에 처하기 위해서 부활하는 것을 우리는 영생의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에 관한 논쟁을 조심해야 할 것은 악한 자도 부활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옥에 빠지는 두 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부활은 생명으로 보지 않아요. 되려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이란 말이죠.

 

부활 신앙이야말로 오늘을 가치있게 살고, 오늘을 분명하게 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기준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하나님을 닮아가는 신앙, 하나님을 소망하는 신앙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그게 아니면 사두개인들처럼 이 땅에서 사는 걸로 발버둥치며 살지 않겠어요? 우리가 죽음 너머를 사모하는 까닭은 우리가 심은 모든 것들이 온전히 피어날 때 그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이 땅의 삶에 얼마나 더 충실해지고 성실해지겠어요?!! 부활신앙이 없이는 우리 신앙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겁니다.

부활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 후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 땅의 삶이 다시 한 번 해석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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