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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삿)

사사기 7:1-8 절벽에 세우는 까닭

by jiroky 2021. 10. 29.

 

기드온이 미디안을 치다

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미디안의 연합군에 맞써 싸울 군대는 고작 300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벽끝에 세우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인간은 내가 가진 것을 의지하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 한 발만 내딛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진짜로 의지합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을 하시는가? 이것이 구원의 전형적인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만이 진실로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구원 받으셨죠? 그러나 그 구원이 과연 어떤 구원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는 시간되길 바랍니다.

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 기드온이 맞서 싸우는 존재는 모두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입니다. 기드온은 바알과 아세라 상을 모두 없애버린 1차 전쟁을 마치고 '우상에 맞써 싸우다'라는 의미의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2차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을 위해서 나팔을 불면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3만 2천명이 모였어요.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3만 2천은 너무 많다고 하시는 거에요. 아니, 기드온 군대 14만에 비하면 텍도 없이 적은데 하나님께서는 너무 많다고 하세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을 위한 전쟁에는 사람이 많을 필요가 없습니다. 되려 사람이 많은 것이 전쟁을 더욱 위태롭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게 아닙니다.

삼상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전쟁인지 나 자신을 위한 전쟁인지 분간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쟁이라면 나 자신은 약해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기드온에게 내가 약해질 때 비로소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요, 선물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서 강해지는 것을 기대하죠? 이걸 신앙의 목적으로 삼으니까 우상숭배로 가는 거에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건 아니에요. 그저 하나님을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거죠.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 두렵고 떨리면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2만 2천명이 돌아가요. 길르앗 산은 여단 동편 므낫세 지파가 있던 땅인데 전투력이 강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에요. 싸울 의지가 없는 자들이 섞여 있으면 되려 전투력이 강한 자들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신20: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싸울 의지가 없는 이들이 있으면 되려 싸움이 되기는 커녕 그들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거에요. 복음을 가지고 번영신학을 만든 자들은 강도요 절도범이에요. 교회에 몇 만명씩 모이는 것은 재앙이에요.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절대 숫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지 않습니다.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 하나님께서 만 명도 많다고 하세요. 그리고 만 명을 놓고 테스트를 하시고 또 추리십니다.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 물가로 데려갔어요. 목이 많이 말랐을 거에요. 물을 보자마자 얼굴을 강물에 대고 마시거나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이 9700명, 나머지 300명은 물을 손으로 떠서 핥아 먹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300명을 전쟁에 참가시킵니다. 이 테스트를 두고 여러가지 해석이 있어요. 당시 강에는 악어들이 많았는데 바로 얼굴을 갖다대고 먹는 자들은 사방을 둘러볼 줄도 모르고 조심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추려냈다는 해석이 있고요,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만 무릎을 꿇었고 절대 다른데서는 무릎을 꿇지 않는 민족이었어요. 그런데 우상 숭배자들이 늘면서 우상들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 잦았어요. 그래서 아무데서나 아무에게나 무릎을 꿇는 자들을 또 추려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결국 요지는 수를 줄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일뿐이고, 결론은 하나님의 군대는 많을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 300명에게 미디안 군대를 넘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승리는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참된 용기의 원천입니다. 세상의 용기는 내 소유, 내 능력에서 나오지만, 내가 가진 것을 단 하나도 의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참된 용기를 지니고 두려움과 떨림을 면할 수 있는 거에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은 이미 승리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그림을 어떤 향태로든 드러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고후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미 이것을 깨달은 거에요. 우리는 가시를 빼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지만,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세상 누가 그런 것들을 기뻐합니까? 그러나 박해과 고난을 기뻐할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거죠.

나에게 주시는 고난과 가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전적으로 나의 약함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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