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베드로후서

[1일1말씀] 베드로후서 1:1-11 성화가 목적입니다

by jiroky 2021. 1. 20.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베드로는 어찌보면 한없이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았어요. 박해를 바라보는 시대에 죽음을 앞두고 있어요. 그는 전서에 이어 두번째 편지를 남기면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어떤 유언을 남겨야할지에 대한 심정으로 편지를 남겼어요. 교회가 어떻게 거룩을 잃지 말아야 하는가? 전서가 교회가 세상 속에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면, 후서에는 어떻게 세상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교회는 세상에 스며들어가야 하지만, 세상이 교회에 들어오면, 침몰하는 배처럼 교회는 가라앉고 말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전서에서도 똑같이 인사말에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지요. 후서에서도 역시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 했지만,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인지를 덧붙이고 있네요. 바로 하나님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얻는다고 말해요.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정확히 앎으로 점점 성숙해져 가는 겁니다.

호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집중할 것이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겠죠? 그럼 세상을 더 얻기위해서 하나님께 매달리겠죠? 결국 초점을 잃고 마는 겁니다.

더 많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요. 하나님은요, 우리에게 끊임없이 '돈을 가져와라', '재능을 가져와라'하는 분이 아니에요. 그냥 단지 "나를 알아라", "내가 누군지 좀 알아라"를 원하시는 거에요.

바르게 아는 것은 바른 관계를 갖는 거에요. 바른 관계를 가지면, 우리의 신앙은 점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의 본질로 다가가게 됩니다. 구원이 중요해요!! 하지만, 구원이 우리 목적지가 아니에요. 구원 이후가 중요하죠! 어떻게 구원을 누리며 이루어 갈 것인가? 그게 성화 아닌가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하고 있어요.

⇒ 그 분의 신기한 능력이라는 것은, '신기한'이라는 표현보다는 '거룩하다'는 뜻이고, '신성한'이라는 뜻이 더 맞아요. 그런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과 경건에 관한 능력이에요.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세요?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십니까?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십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거에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거에요. 닮아가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생명을 주시고, 경건의 능력을 주시는 거에요.

⇒ 우리는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자꾸 달라고 보채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고결한 것을 주실려고 해요. 주시고자 하는 분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이 기도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에요!!

신앙이 한국에 와서 토속신앙과 기복신앙과 서양의 번영신학이 섞여서 이건 뭐 완전 잡동쓰레기가 되버렸어요. 목사가 무당이 되어버렸어요. 정말 안타까워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영적지도자를 찾아가서 그냥 내가 원하는 거 달라고 떼를 쓰는 거에요...

⇒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러나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출발도 과정도 목적도 결과도 다 거룩해야 되요. 그런 신성한 능력으로 경건한 능력을 다 주셨단 말이죠!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 베드로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을 통해서 당시 이미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가 예측할 수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붙잡아야 되는 것은 약속이에요. 그 약속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기억하고 그 신앙에 초점을 맞추는 자가 되는 거에요.

⇒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어요. 우리의 신앙은 누구를 닮아가고 싶어하는 거에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목적이에요. 예수님을 통해서 뭘 얻는 거에 목적을 두는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따라 경건한 삶을 사는 것, 예수님같은 삶을 사는 것... 그러면 당연히 이 세상과 충돌하게 되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세상을 향한 욕망이 꺽어지도록 기도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신앙은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해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더하라는 거에요. 더한다는 말은 지원하고 후원하라는 거에요. 믿음은 기초 씨앗이에요. 거기다가 덕, 다시 말해서 인품, 인격을 더하래요.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우리의 앎은 우리의 인격을 빚어갈 겁니다. 지식은 고상한 지식,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거기다가 절제를 더하래요. 믿음도 지나치면 극단으로 치닫을 수 있잖아요? 극단으로 치닫으면 이단이 되는 거에요. 그 절제에 인내, 경건, 우애,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아가페적 사랑, 조건없는 사랑이에요.

⇒ 믿음은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는 거지요.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지 않으면 그건 바른 믿음인지 점검을 해봐야 되요. 나는 예수님을 너무 잘 믿는데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 저 형제가, 저 자매가 막 미워~ 그건 안 믿는 거에요. 잘못 믿고 있는 거지요.

그렇게 사랑을 더할 때 우리의 믿음은 바른 믿음을 지향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 이런게 있어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게으르지 않는 것이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 거에요. 베드로는 소아시아 출신의 헬라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이 편지를 보냈어요. 다시 말해서 다신교 속에서 유일신을 믿게 된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요. 물론 그들의 삶이 금방 변화하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우리 삶이 바뀌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어요. 신앙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도대체 믿음은 무엇을 위한 건가요? 베드로가 그토록 많은 허물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있을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잖아요! 우리도 같은 변화를 기대할 수 있어요! 베드로가 변한 것 처럼 우리도 변할 수 있어요!!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겠죠?

왜 안 변해요? 죄 가운데 붙들려 있으니까!! 맹인이라 멀리 못보니까!!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어요.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어요. 우리를 택하신 그 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절대 실족할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리가 왜 넘어지고 실족하나요? 그 분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그 가치를 우리가 잊어버리니까요.

그 가치를 알고 기억한다면, 나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노력을 자연스럽게 하지 않겠어요? 진실로 예수와 동행하고 있다면 죄에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거죠. 내가 꾹꾹 참고 미치도록 노력해서 안가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안가게 되는 거죠. 우리가 받은 그 가치를 알면, 그것을 지키겠다 하는게 순교적 삶이에요. 딴게 순교적 삶이 아니에요.

경건과 인내를 더해가는 삶, 그것이 거룩한 삶, 성화의 삶이에요. 우리의 목적은 구원에만 있는게 아니라 성화의 삶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