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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

[1일1말씀] 출애굽기 2:11-25 광야로 도망을 가다

by jiroky 2021. 6. 14.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하다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우리는 흔히 모세의 생애를 3등분해서 기억합니다. 40년 왕궁의 생활, 40년 광야의 생활, 그리고 40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생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말 정교한, 실수 없는 계획을 보게 됩니다. 왕궁에서 모세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겠지요? 그러다 그는 왕궁을 떠납니다. 사실 길들여지면 제 발로는 떠날 수 없는 게 왕궁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떠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시면서 그를 광야로 이끄십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인거죠.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시지만, 그런 단련의 시간을 모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모세가 장성했다고 되어 있어요. 단순히 몸만이 커진 게 아니라 성숙해가는 과정이 있었겠지요. 성숙이란 뭡니까? 나 자신보다 이웃을 배려하는 시간의 역전을 경험하는 때가 성숙이고 장성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을 흔히 어리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장성하면서 이웃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뜻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관심이지요.

행7: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나이가 40이 되서 모세는 자기 형제를 돌볼 생각이 났다는 거에요. 비록 애굽 왕궁에서 자랐지만 나는 애굽인인가, 히브리인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히브리인에서 확인했다는 거지요. 그리스도인이란 내 주위의 이웃이 경쟁 상대가 아니라 자매이고 형제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는 한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죽여서 모래 속에 뭍었어요.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지만 그 범죄가 결국 탄로납니다.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던 모세는 '나는 히브리인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했어요. 그리고 자기 동포를 돌아보는 삶의 큰 변곡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히브리인의 편에 서게 되면서 히브리인의 감독관이었던 한 애굽 사람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를 히브리인이 히브리인으로 받아주느냐는 거지요.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일에 모세가 끼어들었다가 되려 자기의 범죄가 탄로납니다.

 사실 그는 왕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애굽 사람 하나 죽였다고 쫓겨날 처지는 아니에요. 그러나 당시 사정을 보면 하셉수트가 그를 양자로 입양했지만, 하셉수트가 낳은 아이는 없었어요. 그녀의 남편인 투트모스 2세가 죽은 후에는 투트모스 2세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투트모스 3세가 왕이 됐어요. 혈통적인 상황에 미루어서 모세가 양보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투트모스 3세가 즉위한 후에 그에게 가장 위험한 상대는 바로 모세지요. 모세는 눈엣 가시가 된 거에요. 결국 모세는 권력에서 축출됩니다. 쫓겨나서 히브라인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고, 오직 한군데에서 받아줍니다.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이죠.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해야되요. 외로움은 혼자있음의 고통입니다. 하지만 고독은 혼자있음을 즐기는 거에요. 고독은 성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해요. 그런데 이 시대가 고독의 의미를 놓쳤어요. 그래서 혼자있지 못해요. 맨날 핸드폰 영상에 붙들려서 고독이라는 것을 즐기지 못하게 되버렸어요. 외로움이 두려워서 고독조차 피해버리는 삶을 살기 때문에 이렇게 미숙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광야로 간 사건을 굉장히 크게 묘사하고 있어요.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왜 그가 동족의 편에 섰는지, 왜 그가 고난의 길에 접어들었는지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지만 믿음으로 그의 행로를 바꾼 거에요. 믿음의 선택을 하려면 내 인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내 삶을 바꾸는게 신앙의 페러다임입니다. 결국 그는 신앙의 관점으로 자랐고 믿음의 관점으로 인생을 해석했고, 결국 하나님의 편에서 인생을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한 역사입니다.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성경을 보면 늘 사건은 우물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는 미디인 땅에서 미디안 제사장을 만납니다. 여기서 십보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지요.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괜찮은 사윗감이 넝굴째 들어온 거지요. 오갈 때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모세는 잠시 머물자 했겠지만, 40년이나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40년 왕궁에서 살고, 인생의 때를 빼는데 또 다시 40년이 걸립니다. 십보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짓습니다. 아들의 이름의 뜻대로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것은 고독한 시간의 결과 그가 깨달은 것입니다.

 나그네는 돌아갈 길을 깨달은 사람이에요. 나그네가 돌아갈 길을 못깨달으면 방랑자가 되는 거지요.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에 인생의 짐을 무겁게 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인생의 짐을 무겁게 하지 않으려면 나그네의 삶은 적어도 집착하지 않는 삶이 된단 말이지요. 신앙 또한 마찬가지에요. 신앙이란 귀향, 우리가 돌아가야할 아버지 집에 언제 돌아갈지 생각하는 것이고 , 그렇다면 잠시 있는 지금의 나그네의 시간에 너무 짐을 많이 늘리지 않는다는 거에요. 바른 신앙이라면 짐을 줄여야 해요. 여러분은 뭘 그렇게 쌓고 있습니까? 끝까지 붙들고 놓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여전히 인생길이 무겁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해 볼일이지요.

주님께서 광야의 시간을 통해서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 일을 시키시는 거지요. 나그네가 된 모세로부터 아들의 이름을 통해 이런 고백을 듣게 됩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드디어 모세를 죽이려던 애굽 왕 투트모스 3세가 죽었어요. 고개를 들고 나갈 시간이 될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잊혀지는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점점 더 가중되고 부르짖음은 더 커집니다. 하지만 이 부르짖음 또한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는 준비의 시간입니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24절에 와서 하나님이 마치 주인으로 컴백한 것처럼 갑자기 하나님의 이야기가 우리 귀에 쏟아지듯 들리게 됩니다. 모세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같이 감내하시면서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다"라는 것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성경적 표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는 잊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우리 구원을 위한 시간을 정확하게 보고 계십니다.

예애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애가가 얼마나 위기의 순간에 절박한 상황 속에 울려퍼진 노래입니까?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찬양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분이 성실하시기 때문이고, 그 분의 신실하심에 의지해서 주님께 예배의 시간으로 나가는 것이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누구신지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가 되길 축북합니다.

우리는 무기력하고 무능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늘 새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종일 메마른 땅을 걸어갈지라도 오늘 주님을 기억하면 새 힘이 솟을 줄 믿습니다. 사막에 길을 내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고독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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