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출애굽기 (출)

[1일1말씀] 출애굽기 5:15-6:1 이게 다 누구 탓인가

by jiroky 2021. 6. 17.

 

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다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우리가 의도하고 뜻하는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적이나 선한 뜻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더라도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로서는 그 일들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앉는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중한 일에 대해서 직접 바로에게 하소연하러 갑니다. 그러나 결과는 뻔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겪을 때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나요? 여기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갈립니다. 신앙이 없으면 늘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늘 도움의 손길을 사람에게서 찾기 때문에 사람에게 갔다가,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모욕 당하고... 처음부터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지요.

 

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바로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어요. 호소한다는 것은 부르짖었다는 거에요. 원래 이 사람들은 누구에게 부르짖던 사람들이에요? 원래 하나님께 부르짖던 사람들이에요!! 일이 단단히 꼬인 거지요. 종들한테 짚을 안주고 벽돌을 만들라고 하는데 말이 됩니까?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애굽 사람들 때문에 히브리 사람이 죽게 생겼습니다. 바울과 바울 수하의 애굽인들의 죄 때문에 고생은 히브리 백성이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지금 이민족 간의 이야기이지만, 동족 간에는 이런 일이 없었나요? 왕과 왕의 신하들이 잘못 결정하면 백성들이 고생하는 거에요. 이게 세상에 고통과 고난이 많은 이유에요. 정부가 실패하건 정책이 실패하건 고생은 국민이 다 하는 겁니다. 지금 애굽이란 나라는 왕이 누가 되었건 정부 자체가 실패한 정부에요. 이민족을 노예로 다스리는 정책 자체가 바뀔 수 없는 정부에요.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세상의 정부 정권 자체가 실패한 권력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정부의 정책이나 권력에 너무 기대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두번째는 정책 실패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제사드리겠다는데 종교를 허락하지 않는 정책을 폈단말이에요. 정책의 실패로 출애굽이 시작됩니다. 어쨌건 정부라고 하는 것은 태생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이고, 정책은 뭐-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요. 어쨌든 모든 고생은 고스란히 히브리인에게 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두가지 실패를 경험하고 사는 거에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정체성을 가지면 원초적으로, 그리고 태성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상의 정부적 실패 때문에 우리는 고생을 하게 되어 있고, 두 번째는 그들이 세우는 정책 때문에도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는 길을 우리는 가게 됩니다. 그래서 본질을 이해하게 되면 애초부터 실패한 정부에게 가서 호소하는 것 자체가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정책이야 조금 호소할 수 있겠죠?

 


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바로는 "너희가 지금 배가 불러서 시간이 남아도니까 제사를 지내니 이런 생각을 하는 거다"라고 말해요. 바로의 생각에 여호와가 있습니까? 자기가 신인데요 뭐-!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제사 지낸다는 말을 들으면 그 자체가 귀에 들어오지 않죠.

그들이 목적을 세우면 그것은 사람들의 형편과는 상관이 없어요. 인간은 수단일 뿐이죠, 노동력일 뿐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신앙을 가졌다면 인간의 존재 목적이 새롭게 규명되는 겁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게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게 목적이 되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게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쾌락적으로 끌고가는게 목적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인생의 첫단추부터 다르게 끼우고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정책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규명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으면  본질적인 변화는 일으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야가 되건 여가 되건 정부의 성격 자체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제도를 바꿔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함으로 세상을 바꾼단 말이에요. 인간이 안달라지고 아무리 정부를 바꾸고 정책을 바꾼들 무슨 소용이 았냔 말이에요. 그래서 구원의 본질을 놓치면 큰일 나는 거에요. 교회가 휘정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긴 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요. 자기를 영광스럽게 할려고 그러는 거지.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규명이 달라지기 때문에, 나는 뭐 땜에 사느냐  이게 정리가 되야하는 거죠. 세상은 목표중심적이죠. 벽돌 몇개 찍어라 그럼 끝이에요. 재료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오건 언제까지 목표 달성해라 그럼 끝이에요.

 


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바로를 만나고 나온 후에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어요.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미운 털이 박혔고, 우리 고생만 심해졌다는 거에요. 모세와 아론과 함께 출애굽을 결심할 때는 언제고 바로를 만나고 오더니 태도가 돌변했어요. 이게 대부분의 신앙의 모습이에요. 실제적인 위협이나 박해가 오면 이게 누구 때문인지를 규명하느라 시간을 다보내는 거에요. 사탄이 쓰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이에요. 두려움이 오면 이에 맞서려고 하는게 아니라 두려움을 초례하는 원인이 누구 때문인지 찾는단 말이에요. 적은 바로지, 모세와 아론이 아니잖아요? 근데 바로로부터 협박을 받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이 두려움의 원인이 모세와 아론 때문인가? 하고 그 화살이 모세와 아론에게로 가는 거에요. 이게 지는 이유에요. 정작 힘을 합쳐서 싸워도 될까 말까인데, 협박을 받으면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결국 분열 안 하는 쪽이 이기는 거죠. 그래서 늘 하나되라고 하는게 예수님 평생의 기도제목이었어요. 그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제자를 위한 기도가 하나되게 해달라는 거였다고요. 죽을 힘을 다해서 하나 되게 하는게 우리 신앙의 목적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 가정에서 하나되기를 힘쓰십시요. 가정이 하나되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로가 조금 위협하니까 남을 탓하는 거에요. 신앙이 있냐 없냐는 남을 탓하느냐 안 하느냐로 알아요. 남 탓하면 그건 분명히 신앙인이 아니에요.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백성들한테 삿대질당하고 욕을 얻어 먹은 모세가 그들을 욕해요? 모세와 아론은 분노가 안 생겼겠어요? 원망 안 생겼겠어요?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맞대응하지 않아요. 그럼 이 증오와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냐고요? 이 증오와 분노를 되갚는게 우리 신앙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이게 없는 것처럼 꾹꾹 눌러담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위선이에요!! 그럼 이걸 어디다가 푸냐고요?? 그거 푸는 데가 바로 기도의 자리에요. 분노가 없는 거?? 좋지요!! 근데 분노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아주 악하고 못된 거에요. 분노가 나는 건 당연하단 말이에요. 근데 그걸 어디다가 풀거냐? 누구한테 풀긴 풀어야 해요. 그래서 혼자서 방문 잠궈놓고 울며 불며 소리지르며 하는 거죠. 미친 사람처럼 날뛰면 어때요? 누가 보길해요?

우리의 증오심은 해결되야 하는 거지 억제되야 하는 게 아니에요. 이걸 잘못하면 신앙이란 이름으로 위선을 떨거나 착하니즘에 빠져서 착한 신앙인 흉내만 내고 앉아있지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요. 분노는 반드시 해결되야 해요.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 앉는 거에요. 그래서 시편을 읽는 거에요 시편을 보세요. 얼마나 분노가 많아요? 저 집 애들 유리걸식하게 해주세요. 다리 부러뜨려 주세요. 얼마나 끔찍한 표현이 많아요. 하나님께 솔직히 그 분노와 증오를 다 토해내세요.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른 엉뚱한 곳에서 폭발합니다. 자칫 오해하면 너무 우아한 기도만 하고 있어요.

약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혼자서도 기도하고 남을 불러다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해요.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으로 정결케하는 시간이 필요한거죠. 모세가 위대한 신앙인이 된 이유가 뭐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모세 속을 썩이는데요?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러나 모세는 그 화를 하나님 앞에 다 쏟아놓습니다.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구체적으로 기도하니까 구체적으로 응답해주세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할 때가 하나님이 일하실 때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진심을 토해 놓는 시간, 그게 신앙의 기본이고 목적이에요. 모든 관계의 기본은 진심을 다 쏟아놓는 거에요. 기도를 하건, 일을 하건, 말씀을 읽건 온 마음을 다 쏟아 붓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단 한줄 기도하더라도 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