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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

[1일1말씀] 출애굽기 10:1-11 바로의 적은 바로다

by jiroky 2021. 6. 23.

 

여덟째 재앙 : 메뚜기가 땅을 덮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7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9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부모가 아이를 나무랄 때, 큰 아이만 나무라는 것은 큰 아이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아이와 그 아래 아이들에게도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하는 것이고,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죠. 바로와 애굽사람에게 닥치는 고난을 애굽 사람들만 겪는 고통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애굽 백성을 징계함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중입니다. 바로는 순종하면 될 것을 끝내 불순종함으로서 이런 일을 계속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반복됨을 통해서 애굽 백성들은 하나님을 점점 두려워 하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누군지 배우고 있습니다. 재앙이 반복되는 이유는 출애굽해야 하는 세상이 어떤 곳인 보게 하시는 것과, 빠져나올 수 없는 권력이라는 힘으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학습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바로와 애굽 신하들의 마음이 완강해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표징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도 전해지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일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영원히 기억되어 지고 있는 것이죠. 그들이 여전히 유월절, 초막절, 맥추절 절기를 지키는 백성이 된거죠. 영원히 기억되도록한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을 부정했을 때 생기는 결과, 순종했을 때 우리 신앙이 얻게될 목적 이런 것들을 너무 뚜렷하게 학습한 결과이지요. 그들은 자녀를 교육할 때도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들이 말씀을 그토록 가르치는 이유는 말씀이란 곧 죽고사는 길이에요. 신앙 교육의 목적은 학습을 돕는 보조수단도 아니고, 죽고 사는 길이라는 거죠!! 여기서 시작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살아도 죽은 것이다. 하나님 없는 삶은 성공해도 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게 어려서부터 학습되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는 못가르칩니다. 신앙 교육이야말로 어떤 교육에 앞서서 어려서부터 해야하는 교육이에요. 만약 진짜 제대로 모태신앙을 받았다면 그 신앙보다 성공할 수 없는 길은 없습니다. 바로를 통해 가르치고자하는 것은 바로를 깨우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후대에 전하는 가장 중요한 일로 각인시키는 것이죠. 마음판에 새겨넣듯이 가르치는 거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부다를 가르치는 거죠.

 


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지금까지의 재앙 내내 후렴구처럼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줘라. 그들이 원주인을 섬기게 해라. "너는 언제까지 내 앞에서 교만할래?" 이제는 바로에게 직언을 날리지요. 바로의 이런 태도는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겸손하지 못해서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거에요. 교만과 겸손의 차이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여기는 착각!!! 겸손해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내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면되요. 몰라서 그렇지. 착각에서 벗어나면 되요. 살아가는데 교만을 꺽지 못하는 이유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착각이 사라질 때까지 절대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아요. 그럼 내 인생의 가장 큰 훼방꾼운 누구에요? 내꺼라고 착각하는 나 자신이죠. 바로의 큰 훼방꾼은 누구에요? 바로의 적은 바로에요. 누가 감히 절대 권력인 바로를 상대하겠어요. 바로만이 바로를 대적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가장 큰 적이 결국은 자기 자신이라는 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형편이 어렵고 못배워서 이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결국 나 자신을 꺽지 못하는 것,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것,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내가 나를 높이게 되고 우리 인생이 꼬여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거에요. 도저히 인간은 풀지 못하는 인생의 꼬인 실타래를 자기가 풀겠다고 헛짓을 하고 있으니...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 지혜를 수없이 배우지만 정작 내가 누군지 끝내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의 길에는 접어들지 못하고 인생 끝나는 거죠. 그래서 똑똑한 사람이 문제에요.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하나님을 알거든요. 그게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거죠.

 나의 가장 큰 적은 나입니다. 인생의 어떤 누구도 적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나를 도울 거에요. 나를 박해하고 괴롭히더라도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준 천적이지 내가 만든 천적이 아니란 말이에요. 내 인생을 가장 훼방하는 사람은 결국 나에요. 바로가 바로에 걸려 더이상 못나가는 것처럼 나를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구원이 뭔데? 더이상 나를 의지하지 않고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 구원인데 .. 그게 되냔말이에요?

 


4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메뚜기 재앙을 예고합니다. 사실상 재앙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우박으로 쓸고 지나갔지만 그나마 살아남은 이삭마저도 메뚜기 떼가 왔다가면 남는게 없죠. 땅이 안보이고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메뚜기로 덮힌다는 거에요.

 


7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답답하니까 신하들이 반기를 드는 거에요. "지금 애굽이 망한 줄 모릅니까?" 그 사람들 좀 보내줘라 이러다가 애굽이고 뭐고 없다!! 신하도 제 목숨이 살아야 신하에요. 제 목숨 바쳐서 신하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바뀌어야 할 사람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에요. 내가 바뀌면 될텐데 나는 안바뀌고 계속 기도하는 거에요. 내가 포기하면 되는데 포기를 못하고 계속 기도하는 거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신 신 앞에서는 협상이 안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개념을 바꿔야한단 말입니다.

야! 가라! 근데 누구누구 갈래? 조건을 또 달아요. 다 가겠다는데, 왜 물어요? 지금 협상하려는 거죠. 협상이라는 것은 내 입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 현상유지가 목적이에요. 인간이 마치 하나님과 협상하려는 태도를 갖는게 문제에요. 구원이란 현상 유지가 아니라 현상 타파가 목적이에요. 이 현상을 다 타파하려고 하는 분 앞에서 현상 유지하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9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바로의 언변을 보면 참 재밌어요. 어린 아이들까지 보내면 이들이 안돌아올것이 뻔하니까 아이들을 인질로 잡겠다는 표현을 이렇게 돌려서 말하는 거에요. 우리 인생이 다 인질극입니다. 이단도 인질극하는 거죠. 하나님은 인질을 풀어주고자 하는데 중간 관리직들이 인질극을 또 벌이려고 하는 거죠. 종교 시스템도 인질극입니다. 점점 불안하게 만들고, 점점 뭐 가져오라고 하고, 점점 더 일이 많아져요.

 아니 왜 구하는 바를 자기가 결정하냐고요? 너한테 필요한 건 이거야!! 이게 인간을 휘두르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도 몰라요. 그런데 '너 욕망은 이거야' 규정하는 순간 그 때부터 그게 내 욕망이 되는 거에요. 바로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읽듯 읽지 마세요. 우리 인생이 고스란히 여기 다 있어요. 하나님의 특권자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감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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